국내 캐디 효시는 1930년대 인근 마을의 농부
캐디의 역사, 믿지 못할 이야기
골프장에는 골퍼들을 항상 곁에서 따라다니는 캐디가 있다. 과거 프랑스 왕족들이 골프를 칠 때 골프채를 젊은 장교들에게 나르게 했는데, 그 젊은 장교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카데(cadet, 사관학교 생도)’였다. 캐디는 이 단어에서 유래한다. 국내에 캐디가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초 개장한 군자리 코스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캐디는 ‘골프장의 꽃’으로 불린다.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저 짐꾼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실은 프로골퍼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하다. 수원지법은 2009년 10월 “골프장 캐디도 근로 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캐디라고 해서 다 같은 캐디가 아니다. 보통 캐디는 프로투어 캐디와 하우스 캐디로 나뉜다. 프로투어 캐디는 골프 지식이나 실력이 수준급이다.
세계 최고 골퍼의 캐디는 1년에 수십억 원까지 번다.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 때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는 연간 수입이 15억 원이 넘었다. PGA 상금 랭킹으로 봐도 80위권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캐디는 골프장 전속 캐디인 하우스 캐디를 말한다.
초창기엔 골프장 인근 마을에서 농부 고용
국내에 캐디가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초 개장한 군자리 코스시대였다. 앞서 1921년에 개장한 효창원 골프코스와 1924년 개장한 청량리 골프코스 시절에는 캐디라기보다는 골퍼가 코스에 나오면서 직장에서 데리고 나온 사환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마을의 농부를 임시로 고용할 대도 많았다. 1930년대, 경성골프클럽 측은 그날 필요한 인원을 골프장 주변 마을에 연락하면 캐디를 맡을 남자들이 나오는데, 대개 농한기면 농부가 나오고 농번기면 마을소년들이었다. 부산골프코스의 경우 소년캐디에게 등급에 따라 일당 1급 12전, 2급 10전, 3급 6전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골프의 공식 캐디 1호는 누구일까? 1963년 국내 최초의 캐디로 활약했던 최갑윤이 그 주인공이다. 그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세 때인 1957년. 당시 국내에는 골프장이 없었다. 그는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미군들이 골프 연습을 하는 미군부대에서 볼을 줍는 일(소위 볼보이)로 1~2달러 정도의 팁을 받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0년에 개장한 서울CC에 취직을 했다. 서울CC는 국내 1호 골프장이다. 1963년 당시 그의 급료는 300환(약 30원). 그는 “당시는 먹고살기가 워낙 힘들어 넉넉한 집안에서도 자식들에게 ‘이왕 놀려면 골프장에 가서 놀아라’고 말할 정도로 골프장 취직은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메이저대회 US오픈에서 우승한 위대한 캐디
캐디가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1913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주인공은 스무 살의 캐디인 프란시스 위메. 그는 1913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서 열린 US오픈대회에 참가했다. 동기는 간단했다. 당시 최고 선수였던 해리 바돈과 테드 레이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골프 실력은 동네 아마추어 대회에서 1등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경기가 열리는 골프장 지형만큼은 자신의 손금 보듯 훤했다. 수년 동안 그 골프장을 지나며 학교를 오갔던 것이다. 열 살짜리 캐디를 대동한 그는 첫날 선두와 4타차로 선전하며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마침내 연장전까지 가는 투혼끝에 두 거목을 5타, 6타 차이로 따돌리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사진설명 : 1913년 US오픈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한 캐디 프란시스 위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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